불에 타버린 책의 이미지가 잊히지 않고 몇 달째 떠오른다.
몇 달 전, 100년이 넘은 학교 도서관에 불이 났고, 그곳을 빼곡히 채웠던 책이 거의 다 타버렸다.
베르나는 그 불타버린 책들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필사를 하는 장면을 카메라로 담고 싶다는 이야기를 먼저 했었고,
그러면 필사를 할 장소를 생각해보는 게 어떠냐고 베르나가 제안했고,
그러다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세계 곳곳의 이름난 도서관 사진들을 같이 보다가 베르나가 노트북을 꺼냈고,
그 때 나는 처음으로 그 타버린 책들의 사진을 보았다.
책장은 모두 불에 망가졌고 산만하게 널려 있는 무수한 책들은 마치 떼죽음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책 한 권 한 권을 클로즈업 한 사진은 마치 책의 시체를 본 것 마냥 내게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그날 타버린 책의 한 장 한 장의 사진에서 어떤 종류의 통증을 감지했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날 이후 그 타버린 책을 떠올릴 때에는 언제나 그때 감지했던 통증이 먼저 기억나고,
그리고 나서야 그 통증의 기억이 그 때 본 그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러니까 나의 이 글 첫 문장을 정확히 다시 써보자면
‘그때 그 통증이 잊히지 않고 몇 달째 떠오른다.’
베르나에게 이 통증에 대해서 말했더니 그는 문득
어떤 연구자가 비유기적인 물질과 친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베르나는 내가 느꼈던 그 통증과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갑자기 내게 그 말을 한 것일까?
불이 난 것은 한순간이었고, 내가 타버린 책들을 본 순간도 그저 한 순간이었다.
그 단 한번 일어난 강렬한 (사적인) 사건이,
진동의 여운이 끊이지 않는 종처럼 매일같이 내게 찾아오는데,
방금 들이킨 호흡과 그 다음에 들이킨 호흡이 다르듯,
어제 기억한 통증과 오늘 기억한 통증은 미세하게 다르다.
베르나가 잠시 통화를 하러 나간 사이,
그가 읽고 있던 펼쳐진 책의 한 페이지를 나는 무심코 바라보았고,
문득 이 한 구절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기적이고 금속적인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비가 내릴’ 때도 거기에 생명이 있는가?
*2021년 개인전 < 물질의 일일드라마 >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