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내 몸이 몇 개인지
몇 개가 더 죽을 수 있는지
땅은 물렁물렁하고 발걸음은 건들건들하고
공기는 끈적끈적하고 가슴은 우글우글하고
당신의 유령이 거미줄처럼 내 영혼을 채가는 곳
내가 나에게 명복을 빕니다
나는 죽은 몸들을 타고 앉아
남은 몸 몇 개를 재워보네
그리움도 자고 의심도 자고
아직 열지 못한 목구멍도 자고 다 잠들라
김혜순 /토성의 수면제
< 하나, 둘, 셋…일곱번째까지는 세어보았다 (원제:No one to tell) > 의 첫 화면의 시작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노트이다. 관객은 영화시작에서부터 7분 가량 롱테이크로 이 노트 위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 손을 바라보게 된다. 이 공간이 어디인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찻잔 내려 놓는 소리, 가볍게 부는 바람에 종이가 날리고, 쓰는 손이 쉬었다가 사라진 사이에 들리는 창문 닫히는 소리등을 통해서 실내에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트 위에 살짝 겹쳐 놓여진 책이 보이고 노트 위에 한줄한줄 문장이 옮겨지고 있음을 볼 때 관객들은 누군가가 책을 필사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중임을 알게 된다. 노트의 페이지가 점프컷으로 몇 번 넘어가면서 얼기설기 읽히는 문장들을 통해 필사하고 있는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크리스토퍼 리버라는 사람은 스무살이 되었을 때 사회를 떠났고 25년동안 은둔자로 살았다. 그는 숲 속에서 홀로 살았고, 간간히 사람들 몰래 마을에 내려와 책을 훔쳐가서 읽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의 물건이 자꾸 없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마을 사람들이 CCTV를 설치했고, 다음번 책을 훔치러 내려왔을 때 그는 체포되었다.
그 즈음을 써 내려갈 때, 펜을 든 손이 멈추며 이내 프레임아웃 되고, 화면을 가득채우던 노트의 화면이 줌 아웃되면서 카메라가 공간 주위를 돌며 천천히 비추는데 사실 이곳은 누군가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는 거실임을 알 수있다. 후에 관객은 이 공간이 주인공 베르나의 집이며, 필사를 하는 손의 주인 역시 그녀의 것이었음 알게 된다.
베르나는 사진작가이다. 그녀는 화재로 불타버린150년이 된 대학교 도서관의 복구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영화의 장면에서 가장 이상하고도 강렬한 경험은 베르나가 바라보는 렌즈의 시선으로 타버린 책들을 클로즈업 샷으로 바라보게 되는 경험인데, 처음 도서관 내에 검게 타버린 책을 보는 경험은 마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격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나서 느끼게 되는 것이 타버린 책의 시각적 무게감인데, 분명 책의 무게는 그대로이거나 대개는 더 가벼울 것임에도, 이제 저 타버린 책은 너무 무거워져서 들어올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어쩌면 이 느낌은 마치 책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감정적 무게감과 뒤섞여 그런 것인 줄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훼손된 책의 모양과 색깔은 기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데, 잿빛에서 카라멜색으로 이어지는 그을림의 그라데이션, 마치 큰 꽃송이의 마른 꽃잎처럼 보이는 잘려나간 페이지의 충첩된 경계, 끝이 말려지고 어그러진 책의 프레임, 색이 어느정도 증발한 그림과 사진, 부분 부분 점프하며 읽혀지는 제목들, 소제목들, 쪽수들, 살아남은 단어와 문단이 만들어내는 내용 등이 모두 어우러져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베르나는 이 많은 책들 가운데 우연히 은둔자 크리스토퍼에 대한 책을 발견하게 되고, 이 책을 몰래 가져와서 필사를 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구성은 타버린 도서관에서 베르나가 사진 기록을 하는 장면,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매일 저녁 의식처럼 은둔자의 이야기를 필사하는 장면, 일상의 경험들이 뒤섞여 나타나는 베르나 꿈,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또렷해 보였던 세 가지의 줄기는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이것이 꿈 속의 한 장면인지, 도서관에서 타버린 책들을 사진 기록하고 있는 베르나의 일상인지, 필사하는 책에 나오는 은둔자 이야기의 한 장면인지의 경계가 다소 모호해진다.
영화를 이루는 세 가지 주된 장면 구성에서 서사 진행의 속도가 가장 빠른 부분은 은둔자 크리스토퍼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부분이고, 이 이야기를 필사하는 장면은 극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필사 장면을 오랫동안 지켜보게 함으로써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먼저, 화재속에서 일종의 죽음을 맞이한 책은 베르나의 필사를 통해 다시 제 삶을 복구하는 재생의 시간을 갖는다. 타버린 책은 물리적으로 복구될 뿐만 아니라 책 속의 인물과 이야기도 또한 복구가 된다. 책이 인간의 이야기를 저장하는 저장소라는 관점에서보면 베르나의 필사는 어쩌면 삶을 복구하는 작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필사 행위 자체를 지켜보며 얻게 되는 감각적 경험이 있는데, 관객은 매우 촉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필사하고 있는 장면 속에 보이는 종이의 질감과 펜과 종이 사이의 마찰소리같은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차치하더라도, 필사라는 행위가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걷는다는 의미에서,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 사이, 챕터와 챕터 사이를 지나는 손의 호흡과도 같은 움직임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눈으로 독서를 하는 것보다 책 속의 이야기와 더 오랫동안 함께 머무르고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캐릭터의 대화와 독백을 꼼꼼히 곱씹어 보게 된다는 것에서, 저자의 문체와 그 속에 숨겨진 성격과 습관을 면밀히 관찰하게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몸이 다른 몸이 되어보는 간접적이지만 매우 촉각적인 경험이다.
이 영화에는 별다른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어떤면에서는 영화적 사건이 끝난 이후를 영화화 한 영화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극장에서 강렬한 영화를 보고 어둠속을 나와 다시 일상의 현실적 감각을 되찾기 직전 찰나의 림보와도 같은 상태를 길게 연장시켜 놓은 듯하다. 이는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를 넘어가는 순간의 짧은 시간, 나의 삶의 한 챕터에서 다음 챕터의 삶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 글의 시작 부분에 쓰여진 김혜순의 시에서처럼 그런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고, 다만 내 몸이 몇 개인지 앞으로 몇 개가 더 죽을 수 있는지를 세어보게 된다.
영화는 극적인 사건의 부재처럼 사운드도 부재하는데, 이 영화에는 대사나 음악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장면장면이 가지는 상황에 더 몰입하게 되고 일상의 소리들이 오히려 극의 분위기나 감정을 잘 설명해주는 장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말미에 와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르나의 꿈속에서 다음과 같이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목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이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지는 쉽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베르나와 크리스토퍼의 대화, 베르나와 책의 대화 혹은 책과 크리스토퍼의 대화, 필사본과 타버린 책의 대화 그 어느것을 대입해도 그럴법한 대화로 들리는 것이다.
“You speak like a book."
(당신은 마치 책처럼 말하는군요)
"…My vocal, verbal skills have become rather rusty and slow."
(나의 목소리, 말하는 능력은 녹슬고 느려졌어요.)
*위의 글은 부재하는 영화에 대한 비평이자 픽션이다.